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올로고스 왕조 (문단 편집) === [[요안니스 5세]], [[마누일 2세]] vs [[안드로니코스 4세]], [[요안니스 7세]] === 1373년 5월, 요안니스 5세는 오스만 베이국의 부하로서 아나톨리아 원정에 참가했다. 그런데 그가 수도를 비운 틈을 타 안드로니코스 4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무라트 1세의 아들 사우지와 결탁하여 봉기했다. 이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금세 진압되었다. 격노한 무라트는 사우지를 실명시키고, 요안니스 5세에게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물론 안드로니코스 4세의 어린 아들 [[요안니스 7세]]까지 실명시키라고 요구했다. 요안니스 5세는 명령에 따르면서도 약간의 자비를 베풀었다. 두 부자는 한쪽 눈만 잃은 채 콘스탄티노플에 감금되었으며, 안드로니코스 4세의 제위 계승권은 공식적으로 박탈되었다. 제위 상속자가 된 23살의 마누일은 테살로니카에서 황급히 소환되어 9월 25일에 공동 황제가 되었다. 1376년 3월, 요안니스 5세는 베네치아에게 테네도스 섬을 양도하는 대가로 3만 두카토를 받고, 제관의 보석들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러자 제노바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베네치아가 테네도스 섬을 양도받기 전에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376년 7월, 제노바인들은 안드로니코스 4세를 감옥에서 탈출시켰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비밀리에 갈라타로 간 후 무라트와 접촉하여 기병과 보병 혼성군을 얻었다. 그는 그 군대로 콘스탄티노플을 한 달 동안 포위한 뒤 뚫고 들어갔다. 요안니스 5세와 나머지 황족들은 금문의 요새에서 며칠 동안 버텼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그들을 자신이 얼마 전까지 갇혀 있었던 아네마스 탑에 가두었고, 테네도스 섬을 제노바에 양도했으며, 1377년 10월 18일 아들 요안니스 7세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테네도스 섬의 동로마 총독은 제노바에게 넘기기를 거부하고, 베네치아의 함선이 오자 기꺼이 섬을 넘겨줬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4세는 신의를 내보이기 위해 제노바가 그 섬을 무력으로 탈취하는 것을 지원해야 했다. 그러나 제노바는 베네치아에게 패배해 끝내 테네도스 섬을 얻지 못했다. 한편, 무라트는 안드로니코스 4세를 복위시킨 뒤, 그를 복위시키는 대가로 갈리폴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이에 따라 1377년 말 갈리폴리를 오스만 베이국에게 헌납했다. 한편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은 아네마스 탑에 3년간 갇혀 있다가 1379년에 탈출하여 무라트 1세의 진영으로 갔다. 마누일은 무라트에게 자신과 아버지를 복위시켜 주면 공물과 군사 지원을 더 늘리고 소아시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로마의 거점인 필라델피아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무라트는 이를 승낙해 군대를 규합했고, 베네치아는 제노바를 선호하는 성향이 강한 안드로니코스 4세를 제거하기 위해 소함대를 파견했다. 1379년 7월 1일,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는 하리시오스 대문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입성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갈라타의 제노바인들에게 도망쳤다. 1380년, 요안니스 5세와 안드로니코스 4세,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는 각각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벌였다.(제4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무라트는 겉으로는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를 지원했지만 암암리에 안드로니코스 4세를 지원해 양측간의 적대 관계가 지속되게 만들었다. 전쟁은 거의 2년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가, 1381년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제위 계승권을 되찾고 셀렘브리아를 영지로 삼았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도 장차 아버지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1385년 안드로니코스 4세가 사망하자, 요안니스 7세가 셀렘브리아 영지를 물려받았다. 1390년 4월, 요안니스 7세는 숙부 마누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에 반발해 정변을 일으켜 요안니스 5세를 폐위하고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불과 5개월만에 마누일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움으로 요안니스 5세가 복위하였고, 요안니스 7세는 오스만 술탄국에 망명했다. 거듭된 내전으로 제국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하자, 요안니스 5세는 외세의 침략을 우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 중 하나인 '황금 문'을 보강하였다. 그러자 술탄 [[바예지트 1세]]가 보강한 부분을 다시 부수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요안니스는 황금 문의 방어시설을 다시 허물게 하였지만, 이 수모에 심각한 충격을 받고 1391년 2월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